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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으로 만져본 세상속의 한 나라가 한 사람의 세계를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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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1. 국가 지리 형태로 만들어진 대형 퍼즐입니다.(100 x 7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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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에 계신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 제작되었으며 사회 지리 수행 평가 교구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특징 2. 난이도 조절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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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를 쉽게 하려면 퍼즐 판 위에 밑그림을 넣어 하시고, 난이도를 높이려면 밑그림을 없이 하세요.



특징 3. 조각 분실 시 무료 A/S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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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전체를 요청하면 당황스러우니... 분실 된 부분만 사진 찍어 보내주세요.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담아 우편으로 발송하겠습니다.



특징 4. 마커펜으로 쓰고 지울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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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5. 액자 필요 없이 벽에 걸어요. 쏟아지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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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으로 직접 조립한 지도는 확연하게 다르게 보입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부분이 디테일하게 보입니다.


특징 6. 반으로 접었다 폈다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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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으로 접어서 포장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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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성 저기압(tropical cyclone)의 이름 궁금하지 않은가요? 열대성 저기압은 발생 지역에 따라 이름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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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근해에서 발생하면 태풍 typhoon

북대서양, 카리브해, 멕시코만, 북태평양 동부 hurricane

인도양, 아라비아해, 벵골만에서 발생 cyclone

호주 부근 남태평양에서 발생하면 tropical cyclone  

tornado는 열대성 저기압이 아니며 회오리바람을 의미합니다.



▶ 아프리카와 북아메리카의 국경선들은 왜 직선 형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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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발생적인 국경은 바다와 강, 산 등이 경계이기 때문에 구불구불 구부러져 있지만, 직선으로 되어 있는 국경선도 있다. 예를 들면,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은 서쪽의 반이 직선으로 북위 49도 선을 따라 그어져 있다.


이러한 국경선은 새롭게 들어온 세력이 자신이 정복한 땅을 마음대로 분할할 때 생긴다. 지도 위에 자를 대고 선을 그어 국경을 정한 때문인 것이다. 아프리카도 19~20세기에 유럽 열강들이 식민지를 분할할 때 생긴 직선 국경이 많다. 그 때까지 이어져 왔던 나라와 부족의 주거 지역을 무시하고, 경선과 위선을 따라 선을 마음대로 그어 버린 것이다.  "그 결과 한 부족이 둘로 나뉘어 지거나 서로 다른 부족이 하나로 묶였는데, 이것이 독립 후 분쟁의 씨앗이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 서울시교육청 중고교 사회과 추천도서 [이야기가 있는 세계지도 오기노 요이치 지음/김경화 옮김/푸른길 출판사]



▶ 에스파냐라 부를까? 스페인이라고 부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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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는 로마 시대에는 히스파니아로 불렸다. 에스파냐를 영어식으로 스페인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에스파냐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를 스페인으로 부르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토끼가 많은 땅'이라는 뜻의 스페인이란 말은 이베리아 반도에 식민지를 건설했던 페니키아인들이 이곳에 토끼가 많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스페인은 에스파냐Espana를 영어식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E'자가 떨어져 나가면서 굳어진 말이기도 하다. 

--- 출처: 이우평, 『모자이크 세계지리』, 현암사



▶ 인도에는 ‘고맙습니다’라는 뜻에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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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국민의 관습과 여행자의 관습이 서로 달라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 가운데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자 해도 그것을 전혀 이해해 주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외국인과의 교류는 어렵고도 미묘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인도에서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에 해당하는 인도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친절 좀 베풀어 놓고서, ‘고맙습니다.’라고 말 한마디 못하는 인도인이라며 분개하는 것은 이해 부족일 뿐이다. 


전문가에 의하면 ‘단냐와드’라는 말이 가장 근접한 표현이라고 하는데, 이 말에도 주인이 하인에게 쓰는 ‘수고했다’의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어 친구 간이나 모르는 사람에게 쓰기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한다. 최근에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하는 수 없이 영어의 ‘땡큐’라는 표현을 쓴다고 하니 재미있는 일이다.


왜 인도에는 ‘고맙습니다.’라는 단어가 발달하지 않은 것일까? 그 이유는 인도 고유의 신분 제도인 카스트 제도와 'give and take' 정신이 발달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생각은 거지들도 마찬가지여서 지나가는 사람이 돈을 주어도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돈이라는 물질적인 혜택을 받는 대신 공덕을 쌓게 해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아주 이해타산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서울시교육청 중고교 사회과 추천도서 [이야기가 있는 세계지도 오기노 요이치 지음/김경화 옮김/푸른길 출판사]




▶ "쉽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나라! 

오페라 하우스! 노천 탄광! 캥거루! ...... 제임스 쿡은 자신이 ‘발견한’ 호주에 대해 영국의 소유권을 주장해요. 이로 인해 이 땅의 원주민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을 겪게 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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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쿡의 탐험 

‘자연지식의 개선을 위한 런던 왕립협회’는 금성의 식蝕을 관측하기 위해 저명한 천문학자인 찰스 그린을 타히티로 보내기로 결정했고, 돈도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이처럼 막대한 비용이 드는 탐사 기회를 단 한 차례의 천문 관측에만 이용한다는 것은 비효율적이었다. 따라서 그린에게는 일곱 개의 각기 다른 분야를 전공하는 과학자 여덟 명으로 구성된 팀이 동행했으며, 식물학자 조지프 뱅크스와 대니얼 솔랜더가 팀을 이끌었다. 과학자들이 마주칠 것이 분명한 신천지, 동식물, 사람을 스케치하는 임무를 띤 화가 한 사람도 포함되었다. 뱅크스와 왕립협회는 구입할 수 있는 최신의 과학 장비를 갖췄고, 탐험대는 경험 많은 뱃사람인 동시에 뛰어난 지리학자이자 민족지誌 학자인 제임스 쿡 선장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탐험대는 1768년 영국을 출발해 이듬해 타히티에서 금성의 식을 관측하고 태평양의 여러 섬을 답사한 뒤, 호주와 뉴질랜드에 들렀다 1771년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막대한 양의 천문학, 지리학, 기상학, 식물학, 동물학, 인류학 자료를 싣고 귀국했다.탐험대가 찾아낸 것들은 많은 학문분과에 크게 기여했으며, 남태평양의 놀라운 이야기에 대한 유럽인들의 상상력에 불을 지피고 다음 세대의 박물학자와 천문학자에게 영감을 주었다. 


쿡의 탐험에 혜택을 받은 분야 중 하나는 의학이었다. 당시 먼 곳의 해안을 향해 돛을 올리는 선박들은 선원의 절반 이상이 항해에서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죽음의 신은 분노한 원주민이나 적의 전함이나 향수병이 아니었다. 괴혈병이라 불리는 의문의 질병이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피로하고, 우울하며, 잇몸을 비롯한 연약 조직에서 피를 흘렸다. 병이 진행되면 치아가 빠지고, 아물지 않는 상처가 나타난다. 환자는 열이 나고, 황달이 생기며, 사지를 움직일 수 없게 된다.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괴혈병으로 사망한 선원은 약 2백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아무도 몰랐으며 어떤 치료법도 소용이 없어, 선원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갔다. 


1747년 전환점이 마련되었다. 영국 의사 제임스 린드가 이 병에 걸린 환자들에게 대조 실험을 시행한 것이다. 그는 이들을 여러 집단으로 나누고 각기 다른 방법으로 치료했다. 한 집단에는 괴혈병에 흔히 쓰이는 민간요법인 감귤류를 먹으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그러자 이 집단에 속한 환자들이 급속히 회복되었다. 린드는 감귤에 선원들의 몸에 부족한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몰랐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것이 비타민 C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당시 배에서 먹던 식품에는 이 영양소가 특히 부족했다. 장거리 항해를 하는 선원들은 비스킷과 말린 쇠고기로 연명했으며 과일이나 채소는 거의 먹지 않았다. 


영국 해군은 린드의 실험 결과를 믿지 않았지만, 제임스 쿡은 믿었다. 그는 이 의사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기 배에 소금에 절인 양배추를 대량으로 실었으며, 탐험대가 육지에 상륙할 때마다 선원들에게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많이 먹으라고 지시했다. 쿡은 괴혈병으로 한 명의 선원도 잃지 않았다. 그다음 몇 십년간 세계의 모든 해군은 쿡의 해양 식단을 따랐으며, 수없이 많은 선원과 승객이 이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쿡의 탐사는 그보다 훨씬 덜 바람직한 결과도 낳았다. 쿡은 경험 많은 뱃사람이자 지리학자일 뿐 아니라 해군 장교이기도 했다. 왕립협회가 탐험 비용의 대부분을 댔지만 선박 자체는 영국 해군에서 제공한 것이었다. 해군은 또한 85명의 잘 무장한 선원과 해병대를 파견했으며 배에는 대포, 머스킷 총, 화약을 비롯한 무기가 실려 있었다. 탐사대가 수집한 정보 중 많은 부분 - 특히 천문학, 지리학, 기상학, 인류학 데이터 - 은 정치 군사적 가치가 뚜렷했다. 괴혈병의 효과적인 치료법이 발견된 덕분에, 영국은 세계의 대양을 지배하고 지구 반대편에 군대를 보내는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쿡은 자신이 ‘발견한’ 수많은 섬과 육지에 대해 영국의 소유권을 주장했는데, 대표적인 곳이 호주였다. 쿡의 탐사대는 영국이 남서 태평양을 점령하고, 호주, 태즈메이니아, 뉴질랜드를 정복하고, 수백만 명의 유럽인이 새로운 식민지에 정착하며, 그곳의 토착문화를 파괴하고 원주민 대부분을 박멸할 기초를 닦아주었다. 쿡의 탐사 다음 세기에 호주와 뉴질랜드의 원주민들은 가장 비옥한 땅을 유럽 정착민들에게 빼앗겼다. 원주민의 수는 90퍼센트 가량 줄었고 생존자들은 인종차별적인 가혹한 정권의 지배를 받았다. 호주 원주민과 뉴질랜드 마오리족에게 쿡의 탐사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의 시작이었다.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은 이보다 더 나쁜 운명을 맞았다. 아주 훌륭한 고립 속에서 1만 년을 살아남았던 이들은 쿡이 도착한 지 1세기도 지나지 않아 마지막 남자, 여자,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제거되었다. 유럽 정착민들은 처음에 이들을 섬의 가장 비옥한 영역에서 몰아냈고, 이어 남아 있는 황무지까지 탐낸 나머지 이들을 체계적으로 사냥하고 살해했다. 몇 되지 않은 생존자들은 기독교 복음주의교파의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는데, 이곳에서는 선의를 지녔지만 그다지 열린 마음을 갖지 못한 선교사들이 서구 세계의 방식으로 이들을 가르치려 했다. 


태즈메이니아인들은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 기독교를 배웠으며, 천을 바느질하고 농사를 짓는 등 다양한 ‘생산적 기술’을 교육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학습을 거부했다. 이들은 계속해서 더욱더 우울해했으며, 아기를 갖지 않게 되고 삶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 마지막에는 과학과 진보의 현대 세계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 길, 죽음을 선택했다. 


아, 과학과 진보는 이들의 사후 세계에까지 따라갔다. 인류학자들과 큐레이터들은 과학의 이름으로 마지막 태즈메이니아인들의 사체를 강탈했다. 그들은 사체를 해부하고, 무게를 재고, 측정하여, 그 분석 결과를 학술지에 실었다. 태즈메이니아 박물관은 1976년에 이르러서야 1백 년 전에 죽은 최후의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트루가니니의 시신을 매장할 수 있도록 내놓았다. 영국 왕립외과대학은 그녀의 피부와 머리카락 표본을 2002년까지 보유했다.


쿡의 배는 군대의 보호를 받은 과학탐사대였을까, 아니면 소수의 과학자가 따라붙은 군사원정대였을까? 이것은 연료통이 반쯤 찼는지 반쯤 비었는지를 묻는 것이나 다름없다. 둘 다에 해당한다. 과학혁명과 현대 제국주의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제임스 쿡 선장과 식물학자 조지프 뱅크스 같은 사람들은 과학과 제국을 거의 구분하지 못했다. 불운한 트루가니니도 마찬가지였다. 

----- 사피엔스 中에서 저자 유발 하라리, 역자 조현욱,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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