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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udy of geography is about more than just memorizing places on a map. It's about understanding the complexity of our world, appreciating the diversity of cultures that exists across continents. And in the end, it's about using all that knowledge to help bridge divides and bring people together.” - Barack Obama -


The World is Wide. 와이드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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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playing with the puzzle, students observe the entire country in detail and goes through the process of searching the pie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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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demap prepared the pieces for country figures so that in this process the students are naturally able to consider details relating to each country one more than and observe. 

▶ Observe carefully the pieces and the whole 

▶ Look for the piece and its location 

▶ The feeling of setting the pieces by pressing them on where they belong is especially good for children who use smartphones and computer keyboards.


1. Puzzle pieces are constituted for each country 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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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ing to set the pieces is so much fun for the hands! It is a non-toxic compressed sponge (EVA) material and has good thickness(5 mm) and touch feels.


2. Enjoy at the appropriate le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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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el of difficulty can be adjusted. There is no separate sketch. If a sketch is inserted, the puzzle can be enjoyed more easily. At the beginning, a sketch can be inserted for use and later, it can be down without the sketch once adjusted.


3. In case of loss of puzzle losses, they are provided without char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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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would be sad you ask for all pieces for a given region. For example, all for the Pacific region … We love the customer who requests for A/S by kindly taking a picture of lost parts only! Please do not lose too many pieces. 


4. They can use the marker pen to write and erase and scrib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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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they scribble using oil based pen, do not worry. By pressing with the pencil eraser hard, this can be removed.


5. The charm of the Widemap puzzle hanging on the w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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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is noticeably different from hanging regular maps. As the students observed the pieces carefully and felt each country by their fingertips, details of their geographical shapes are more noticeable by the eyes and they can understand various meanings of various geographical cultures and relationships.


6. We deliver to anywhere in the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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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의 중심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회화의 원근법perspective과 더불어 지도의 투영법projection은 가장 대표적인 ‘재현’ 방법이다. 계산 가능한 범위 내의 축척이 사용된 지도로 지구를 재현하고, 원근법을 이용해 입체적으로 보이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면서 부터 인류 역사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곰 한 마리가 A 지점에서 출발해 남쪽으로 1킬로미터 걸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방향을 바꿔 동쪽으로 1킬로미터 간다. 그리고 거기서 또 다시 방향을 바꿔, 북쪽으로 1킬로미터 걸어갔다. 그랬더니 출발점인 A 지점에 다시 도착하게 되었다. 이 곰은 무슨 색일까?"


난센스 퀴즈가 아니다. 수학자 폴리아G. Polya가 진지하게 낸 문제다. 답은 ‘흰색의 북극곰’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곰의 색이 아니다. 남쪽으로 1킬로미터, 동쪽으로 1킬로미터, 북쪽으로 1킬로미터를 갔는데,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사실이다. 지구가 둥근 입체가 아니라 평면이라고 생각하는 맹점을 걸고 넘어지는 문제다. 


습관적으로 우리는 지구가 평면이라고 생각한다. 3차원의 지구를 2차원 평면에 옮겨놓은 지도 때문이다. 인공위성에서 찍은 지구의 둥근 사진도 3차원이 아니다. 2차원의 둥근 원일 뿐이다. 지도 투영법의 전제가 되는 유클리드 기하학은 애초부터 3차원 공간에는 적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유클리드가 생각하는 공간이란 비어 있고, 어느 방향으로나 질적으로 동일하며, 평평하다. 따라서 공간을 원, 삼각형, 평행선, 수직선으로 단순화해 계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구와 같은 구면체를 평면에 정확히 투영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1820년대 독일의 수학자 가우스C. F. Gauss는 지구의 모양을 왜곡하지 않고 고정된 축척으로 평면에 옮길 수 없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그러나 앞의 ‘북극곰 퀴즈’가 보여주듯 유클리드 기하학적 사고는 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세계지도가 실제의 세계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착각이다.? 


나도 그랬다. 독일 유학을 떠날 때, 독일 국적의 루프트한자Lufthansa 비행기에 비치된 기내 잡지의 세계지도를 보기 전까지 나는 한 번도 지도의 객관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지도는 각 대륙의 크기와 위치를 정확히 반영한다고 생각했다. 세계지도는 오직 한 가지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전 처음 외국으로 나가는 비행기 안에서 난 아주 낯선 세계지도를 보았다. 


세계지도 한가운데 유럽 대륙과 대서양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이제까지 세계지도 한가운데 있다고 알고 있던 태평양은 둘로 쪼개져 지도 양끝으로 밀려나 있었다. 황당했다. 


 그러나 이렇게 생긴 지도로 봐야 우리나라가 ‘극동아시아Far East Asia'에 속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동中東 지방은 근동近東과 극동極東 사이에 놓여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렇게 생긴 지도로 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근동, 중동, 극동과 같은 지역 명칭은 유럽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하는 것임을 그때서야 겨우 깨달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까지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던, 태평양이 가운데 있는 지도는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16세기 말 중국에 포교하러 온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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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세계지도 만국전도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지도, 태평양이 가운데 놓인 지도는 16세기 말 중국에 포교하러 온 마테오 리치의 작품이다. 중국이 변방에 놓인 유럽식 세계지도를 보고 열 받은 중국인들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그가 중국의 황제와 귀족들에게 선물하려고 본국에서 가져온 지도에는 중국이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었다. 세계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중화中華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당연히 중국 사람들을 화나게 했다. 마테오 리치는 재빨리 동경 170도 부근을 중심으로 하는 지도를 만들었다. 또한 중국이 더 크게 보이도록 확대해 중국인들을 안심시켰다. 그 후로 아시아에서는 태평양이 가운데 있는 지도를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이 지도는 태평양의 위치만 한가운데로 바뀌었을 뿐이다. 극동, 중동과 같은 지역 명칭이 보여주듯, 지도의 중심은 여전히 유럽이었다. 단순한 명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출처 [에디톨로지 창조는 편집이다 -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선생 지음 /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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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관계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신세계와 유럽의 접촉은 A.D.986년~약 1500년경까지 극소수의 스칸디나비아인들이 그린란드에 들어왔던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에 가시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발전된 구세계 사회와 신세계 사회가 본격적으로 충돌한 것은 1492년의 일이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당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밀집해 살고 있던 카리브 해의 여러 섬들을 ‘발견’하면서 갑작스럽게 시작된 것이다.


그 이후 전개된 유럽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관계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1532년 11월16일 잉카의 황제 아타우알파와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페루의 고지대 도시인 카하마르카에서 최초로 마주친 사건이었다. 아타우알파는 신세계에서 가장 크고 발전된 국가의 절대 군주였고 피사로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던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또는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를 대신하고 있었다. 168명의 스페인 오합지졸을 거느린 피사로는 낯선 땅에 들어왔다. 그는 그 지역 주민들을 잘 몰랐고 가장 가까운 곳(북쪽으로 1600km나 떨어진 파나마)에 있던 스페인인들과도 연락이 완전히 끊어졌으므로 때맞춰 원병이 도착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반면에 아타우알파는 수백만의 백성이 있는 자기 제국에 버티고 있었으며, 더구나 다른 인디언과의 전쟁에서 막 승리를 거둔 8만 대군이 그를 둘러싼 형국이었다. 그런데도 두 지도자가 얼굴을 맞대고 미처 몇 분이 지나기도 전에 피사로가 대뜸 아타우알파를 사로잡아 버렸던 것이다. 피사로는 그로부터 8개월 동안이나 이 인질을 붙잡아 놓고 나중에 풀어준다는 약속 하에 역사상 가장 많은 몸값을 뜯어냈다. 피사로는 가로 6.7m, 세로 5.2m에 높이 2.4m가 넘는 방을 가득 채울 만큼의 황금을 몸값으로 받은 후에 약속을 저버리고 아타우알파를 처형하고 말았다.


아타우알파를 생포한 것은 유럽이 잉카 제국을 정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물론 스페인의 무기가 더 우수했으므로 어차피 결국에는 스페인의 승리로 끝났겠지만 아타우알파를 사로잡은 덕분에 정복 과정이 훨씬 더 쉽고 신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타우알파는 잉카족이 태양신으로 숭배하는 존재였고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백성들은 그가 사로잡힌 상태에서 내리는 명령에도 무조건 복종했다. 아타우알파를 죽일 때까지의 몇 달은 피사로가 탐험대를 파견하여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잉카 제국의 다른 지역들을 마음껏 돌아다니게 하고 파나마에 원병을 요청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따라서 아타우알파를 처형한 후 드디어 스페인인과 잉카족의 싸움이 시작되었을 때 스페인의 병력은 전보다 막강해져 있었다.


그러므로 아타우알파가 생포된 사건은 근대사의 가장 큰 충돌이자 결정적인 순간이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하지만 그보다 일반적인 측면에서도 관심을 가질 만하다. 왜냐하면 피사로가 아타우알파를 사로잡을 수 있게 만든 요인들은, 본질적으로 근대에 세계 각지의 이주민과 원주민 사이에서 벌어졌던 유사한 많은 충돌 사건을, 그것들을 결정지었던 요인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타우알파 생포 사건은 세계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넓은 창문인 셈이다.


그날 카하마르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다. 여러 명의 스페인 측 참가자들이 그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당시의 사건들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 우선 피사로의 동생 에르난도와 페드로를 비롯하여 여섯 명의 동료들이 진술한 목격담들을 모아 재구성해 보기로 하자.


스페인 사람들-로마 가톨릭 제국의 무적 황제이기도 하신 우리 국왕 전하의 신하들-의 신중함, 강인함, 군기, 근면성, 위험을 무릅쓰는 항해, 그리고 전투력 등은 기독교도에게 기쁨이요 이교도들에게는 공포가 될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또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가톨릭 활제 폐하께 미력하나마 도움을 드리기 위해 소신은 이 이야기를 기록하여 폐하께 바침으로써 여기 담긴 내용을 모두가 알게 하고자 합니다.


스페인 사람들-로마 가톨릭 제국의 무적 황제이기도 하신 우리 국왕 전하의 신하들-의 신중함, 강인함, 군기, 근면성, 위험을 무릅쓰는 항해, 그리고 전투력 등은 기독교도에게 기쁨이요 이교도들에게는 공포가 될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또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가톨릭 활제 폐하께 미력하나마 도움을 드리기 위해 소신은 이 이야기를 기록하여 폐하께 바침으로써 여기 담긴 내용을 모두가 알게 하고자 합니다.


이는 하느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 될 터, 저희는 하느님의 성스러운 인도하심에 힘입어 무수한 이교도들을 정복하고 성스러운 가톨릭 신앙으로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는 황제 폐하의 영예이기도 한 바, 폐하의 지대하신 능력과 행운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일들이 당대에 이루어진 까닭입니다. 저희가 이러한 여러 싸움에서 승리했고 이러한 땅을 발견하여 정복했으며 이러한 부를 전하와 기독교도에게 바쳤으니 이는 기독교에게 기쁨이 될 것이요 이교도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고 세계만방이 경탄하게 한 일입니다.


고금을 통틀어 과연 그 어느 때 이러한 소수가 이처럼 많은 적에 대하여 이처럼 다양한 풍토를 겪으며 이처럼 많은 바다를 건너고 이처럼 넓은 땅을 지나서 이렇게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곳을 평정하는 이와 같은 공적을 이룩한 일이 일찍이 있었으리까?


그 누가 스페인의 위업에 필적할 수 있으리까? 우리 스페인 사람들은 그 수가 적어서 모두 200명이나 300명을 넘지 못했고 때로는 100명이나 그 이하에 불과했으되 일찍이 알려진 바도 없고 기독교도와 이교도를 막론하고 그 어느 군주도 소유한 바 없을 만큼 드넓은 땅을 우리 시대에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소신은 다만 이 정복 과정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할 뿐 자칫 장황해질까 저어하여 길게 쓰지는 않겠습니다.


피사로 대장은 우선 정보를 얻기 위해 카하마르카에서 온 인디언들을 고문했습니다. 그자들은 아타우알파가 카하마르카에서 대장을 기다린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자백했습니다. 그러자 대장은 저희에게 전진을 명하였습니다. 카하마르카의 초입에 이르렀을 때 저희는 멀리 5km 거리의 산자락에 펼쳐진 아타우알파의 숙영지를 보았습니다. 인디언들의 숙영지는 흡사 아름다운 도시 같았습니다. 저들의 천막이 너무 많아서 저희 모두는 크게 우려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이러한 광경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스페인 사람들은 두려움과 당혹감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두려움을 드러내거나 뒷걸음치지 않았습니다. 만약 인디언들이 저희의 약함을 눈치 챘다면 안내인으로 데려갔던 인디언들조차도 저희를 죽이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희는 짐짓 충천한 사기를 내보이며 그 마을과 천막들을 유심히 관찰한 후 골짜기를 타고 내려가서 카하마르카에 입성하였습니다.


저희는 앞으로 할 일에 대해 오랜 시간 동안 의논했습니다. 저희의 수가 너무 적거니와 원병을 기대할 수고 없는 곳으로 깊이 들어온 터였으므로 모두가 두려워했습니다. 저희 모두는 대장과 만나 다음날 해야 할 일들을 논의했습니다. 그날 밤에는 잠을 잔 이들이 별로 없었고 저희는 카하마르카의 광장을 감시하며 인디언 대군의 모닥불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무서운 광경이었습니다. 모닥불은 대부분 산비탈에 지펴졌는데 서로 가까이 붙어 있어서 마치 수많은 별들이 하늘을 수놓은 듯했습니다. 그날 밤에는 높고 낮음의 구별도 없었고 보병과 기병의 구별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완전 무장한 채 파수를 보았습니다. 저희 대장도 마찬가지로 줄곧 돌아다니며 부하들을 격려했습니다. 대장의 아우인 에르난도 피사로는 인디언의 병력을 40000으로 추산했지만 사실은 80000이 넘었으므로 저희를 격려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이튿날 아침에 아타우알파의 사자가 도착하자 대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인에게 가서 아무 때나 원하는 방식으로 오시되 어떻게 오시든 나는 친구이며 형제로서 삼가 맞이하겠다고 전하시오. 어서 뵙고 싶으니 되도록 빨리 오셨으면 좋겠구려. 그분을 모욕하거나 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것이오.”


대장은 카하마르카의 광장 주변에 병력을 감춰놓았습니다. 기병대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아우 에르난도 피사로에게, 또 하나는 에르난도 데소토에게 지휘를 맡겼습니다. 보병들도 마찬가지로 나누어 일부는 자신이 맡고 일부는 아우 후안 피사로에게 주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페드로 데 칸디아에게 명하여 보병 두세 명과 함께 나팔과 총을 지니고 광장에 있는 작은 보루에 가서 자리를 잡게 했습니다. 일단 아타우알파가 인디언들을 거느리고 광장에 들어서면 대장이 칸디아와 부하들에게 신호를 보내고, 그러면 그들이 총을 쏘기 시작하면서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그러면 넓은 뜰에 숨어서 대기하고 있던 기병대가 그 나팔 소리를 듣고 달려 나오기로 했습니다.


정오 무렵이 되자 아타우알파가 신하들을 정렬시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저희는 곧 들판 전체가 인디언들로 가득 차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따금씩 걸음을 멈추고 뒤편 숙영지에서 더 많은 인디언들이 쏟아져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무리를 지어 자꾸자꾸 나타났습니다. 행렬의 앞부분은 이미 저희 숙영지에 가까이 이르렀는데도 인디언의 숙영지에서는 더 많은 병력이 차례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아타우알파의 전면에는 2000명의 인디언이 앞장서서 길바닥을 쓸었습니다. 그 다음은 전사들이었는데 절반은 아타우알파의 좌측, 절반은 그 우측에서 들판을 따라 행진했습니다.


맨 앞에는 체스판처럼 두 색깔로 된 옷을 입은 인디언들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땅에 떨어진 지푸라기를 줍고 길을 쓸면서 전진했습니다. 그 뒤에서는 각기 다른 옷을 입은 세 무리가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다음은 갑옷을 입고 커다란 금속판을 들고 금은관을 쓴 남자들이 뒤따랐습니다. 그들은 금붙이와 은붙이를 너무도 많이 지니고 있어서 햇빛에 일제히 반짝이는 광경은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그들 속에는 아타우알파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는 가마채 끝에 은을 씌운 몹시 사치스러운 가마를 타고 있었습니다. 80여명의 고관들이 그 가마를 어깨에 메었으며 모두 화려하고 푸른 제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아타우알파도 대단히 화려한 차림이었습니다. 그는 머리에 왕관을 쓰고 목에는 큼직한 에메랄드로 만든 목걸이를 두른 채 가마위에서 화려한 쿠션이 깔린 조그마한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가마는 여러 빛깔의 앵무새 깃털로 덮여 있었으며 금판과 은판으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아타우알파의 뒤에는 다시 가마 두 채와 해먹 두 개가 더 있었는데, 거기에는 높은 추장들이 탔고 그 뒤로 몇 무리의 인디언들이 금은관을 쓰고 따라왔습니다. 이 인디언 무리는 웅장한 노래와 함께 광장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광장을 구석구석 채웠습니다. 한편 우리 스페인 사람들은 뜰에 숨어 대기하면서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겁에 질린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오줌을 지리는 자들도 많았습니다. 이윽고 광장 중앙에 도착한 아타우알파는 그대로 가마 위에 높이 앉아 있었고 그의 군대는 잇따라 행진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피사로 대장은 비센테 데 발베르데 수사를 아타우알파에게 보내어 하느님과 스페인 국왕의 이름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에 복종하고 스페인의 국왕 천하를 받들 것을 요구하도록 했습니다. 그리하여 수사는 한 손에 십자가와 다른 손에 성경을 들고 인디언 군대 사이를 비집고 아타우알파 앞에 나아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사제로서 기독교인들에게 하느님의 일들을 가르치나니 그대들 또한 가르치러 왔소. 내가 가르치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 책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들이오. 그러므로 하느님과 기독교인들을 대신하여 그대가 그들과 벗이 되기를 청하는 바,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요 또한 그대에게도 유익하기 때문이오.”


그러자 아타우알파는 성경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으며 수사는 성경을 닫힌 채로 건네주었습니다. 그러나 아타우알파는 성경을 어떻게 펼쳐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수사가 대신 해주려고 손을 내밀자 아타우알파는 성경을 펼치기 싫다는 듯이 갑자기 격노하여 수사의 팔을 때렸습니다. 그러더니 자기가 손수 펼쳤는데, 글자나 종이를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고 얼굴이 시뻘게지더니 대여섯 걸음 저쪽으로 휙 내던졌습니다.


수사는 피사로에게로 돌아오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오시오! 나와요, 기독교인들이여! 하느님의 일들을 거부하는 개같은 적들을 물리치시오. 저 폭군이 내 성스러운 율법의 책을 땅에 던졌소! 그걸 보지 못하였소? 제아무리 들판에 인디언들이 가득한들 저 자만심 가득한 개에게까지 굳이 공손하고 비굴하게 굴 필요가 있겠소? 내가 죄를 사하나니 어서 나와서 저 자를 치시오!”


그러자 대장은 칸디아에게 신호를 보냈고 칸디아는 당장 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자 갑옷을 입은 스페인 군대가 기병과 보병을 막론하고 각각 숨어 있던 곳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광장에 가득 모여 있던 무장하지 않은 인디언들을 덮치며 스페인의 전투 함성을 외쳤습니다.


“산티아고!” 


저희는 인디언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말에 딸랑이를 달고 있었습니다. 우렁찬 총 소리와 요란한 나팔 소리, 딸랑이 소리 때문에 인디언들은 크게 놀라 갈팡질팡했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그들에게 덤벼들어 가차 없이 베어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인디언들은 겁에 질린 나머지 서로 짓밟고 올라가다가 산더미처럼 쌓여 질식해 죽는 자가 부지기수였습니다.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그들을 공격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아무런 위험도 없었습니다. 기병대는 말을 몰아 인디언들을 쓰러뜨리고 죽이거나 부상을 입히면서 그들을 추격했습니다. 보병들도 남아 있던 자들을 공격하여 잠시 후에는 적의 대부분이 칼날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대장도 스페인 사람들과 함께 칼과 단검을 들고 인디언들 속으로 뛰어들어 용맹을 떨치며 아타우알파의 가마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두려움 없이 아타우알파의 왼팔을 붙잡고 “산티아고!” 하고 외쳤으나 가마가 너무 높아서 아타우알파를 끌어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저희는 가마를 멘 인디언들을 마구 죽였지만 그때마다 다른 자들이 그 자리에 들어 와서 가마를 높이 들어 올렸고 그런 식으로 인디언들을 죽여 없애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마침내 일고여덟 명의 스페인 사람들이 말을 몰고 달려와 한쪽에 달라붙어 안간힘을 쓴 끝에 가마를 쓰러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아타우알파를 사로잡았습니다. 대장은 아타우알파를 자기 거처로 끌고 갔습니다. 가마를 메고 있던 인디언들과 아타우알파를 호위하고 있던 자들은 끝까지 그를 저버리지 않고 모두 그 곁에서 죽어갔습니다.


겁에 질린 채 아직 광장에 남아 있던 인디언들은 총 소리와 말 때문에 몹시 놀라서(둘 다 그들이 일찍이 보지 못한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길게 뻗은 담벼락을 무너뜨리고 광장을 벗어나 그 바깥 들판으로 도망치려 했습니다. 우리 기병대는 무너진 담을 뛰어넘어 들판으로 돌진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자들을 쫓아라!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창에 꿰어버리자!”


아타우알파가 데려온 나머지 인디언 병사들은 카하마르카에서 1.6km쯤 떨어진 곳에서 싸울 준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한 명도 움직이지 않았고 그때까지 스페인 사람에게 무기를 겨눈 인디언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마을 바깥 들판에 남아 있던 인디언들의 부대는 다른 인디언들이 고함을 지르며 도망치는 것을 보더니 대부분이 역시 겁에 질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정말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20~30km에 걸쳐 계곡 전체가 인디언들로 완전히 뒤덮였던 것입니다. 이미 밤이 되었지만 우리의 기병대는 계속 들판에서 인디언들을 찔러 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팔 소리가 들려와서 저희는 숙영지로 돌아왔습니다.


만약 밤이 오지만 않았더라면 4만이 넘는 인디언 대군 중에서 살아남은 자는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죽어 넘어진 인디언들은 6000~7000명에 달했고 팔이 잘리는 등 부상을 당한 자들도 많았습니다. 아타우알파도 그 싸움에서 우리가 7000명가량을 죽였다고 인정했습니다. 다른 가마에서 죽임을 당한 자는 바로 아타우알파의 대신이며 그가 총애하던, 친차의 영주였습니다.


아타우알파의 가마를 메고 있던 인디언들도 모두 높은 추장이나 고관들인 듯했습니다. 그들도 모두 죽임을 당했고 다른 가마나 해먹에 타고 있던 인디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카하마르카의 영주도 죽고 다른 영주들도 많이 죽었지만 그 수효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헤아릴 수도 없었습니다. 아타우알파를 수행하고 왔던 자들은 모조리 고관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대군을 거느리고 왔던 이 강력한 지배자가 그렇게 잠깐 사이에 사로잡히고 만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저희들의 수는 너무 적었으므로 사실 이 일은 저희들의 힘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타우알파의 망토는 스페인 사람들이 그를 가마에서 끌어내릴 때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대장은 그에게 옷을 가져다주라고 명했습니다. 아타우알파가 옷을 입고 나자 대장은 아타우알파를 가까이 앉힌 후 드높은 지위에서 그토록 순식간에 추락한 데 대한 분노와 흥분을 달래주기 위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가 패하여 포로가 된 것을 모욕으로 생각하지 마시오. 여기 있는 이 기독교인들은 비록 그 수는 적지만 나는 이들과 더불어 그대의 왕국보다도 큰 왕국들을 정복하고 그대보다도 강력한 군주들을 무찔러 우리의 황제 폐하께 복속시켰소. 폐하는 스페인과 전세계의 왕이시며 나는 폐하의 신하요. 우리는 폐하의 명에 따라 이 나라를 정복하러 왔으며 이는 하느님과 그의 성스러운 가톨릭 신앙을 만민에게 알리기 위함이었소.


우리의 임무는 선한 것이므로 하늘과 땅과 그 속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이 일을 허락하셨고 이는 그대가 하느님을 알고 지금까지의 야만스럽고 사악한 삶에서 벗어나게 하려 하심이오. 우리가 이토록 수가 적은데도 그 많은 사람들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까닭이었소. 그대가 지금까지의 삶에서 잘못을 발견할 때, 우리가 이렇게 스페인의 국왕 전하의 명에 따라 그대의 나라에 들어옴으로써 오히려 그대에게 선행을 베풀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오. 하느님도 그대의 자만심을 꺾고 그 어떤 인디언도 기독교인을 거스르지 못하도록 이 일을 허락하셨기 때문이오.”


어째서 스페인인은 원주민들을 참패시킬 수 있었을까? 

이제 이 비범한 대결에서 작용했던 인과 관계의 사슬을 더듬어봐야겠는데, 우선 직접적인 사건들부터 살펴보자. 피사로와 아타우알파가 카하마르카에서 만났을 때, 어째서 아타우알파의 압도적인 대군이 피사로를 사로잡아 죽이지 못하고 반대로 오히려 피사로가 아타우알파를 사로잡고 수많은 신하들을 죽일 수 있었을까? 어쨌든 피사로에게는 말을 탄 62명의 병사와 106명의 보병이 전부였고 아타우알파는 약 80000명에 이르는 대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들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있었던 일을 보자면, 도대체 아타우알파는 어쩌다가 카하마르카로 오게 되었을까? 어째서 아타우알파가 스페인에 가서 카를로스 1세를 생포하지 못하고 반대로 피사로가 카하마르카로 와서 아타우알파를 생포하게 되었을까? 결과를 이미 알고 있는 우리가 보기에는 명백한 함정이었는데 어째서 아타우알파는 멋모르고 그런 함정 속으로 걸어 들어갔을까? 아타우알파와 피사로의 만남에서 작용했던 요인들은 과연 범위를 넓혀 구세계와 신세계 및 그 밖의 민족들 사이의 만남에서도 똑같은 역할을 했을까? 


어째서 피사로가 아타우알파를 사로잡게 되었을까? 피사로의 군사적 이점은 스페인의 쇠칼을 비롯한 무기들, 갑옷, 총, 말 따위였다. 그러한 무기에 대항하여 싸움터에 타고 갈 동물도 갖지 못한 아타우알파의 군대는 겨우 돌, 청동기, 나무 곤봉, 갈고리 막대, 손도끼, 그리고 물매(원심력을 이용하여 돌은 던지는 기구, 보통 가죽 조각에 끈 두 개를 이어 만들지만 남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돌 세 개를 끈으로 연결한 ‘볼라’라는 무기를 던져 짐승 등을 잡았음-역주)와 헝겊 갑옷 등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장비의 불균형은 유럽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및 기타 민족들 사이의 수많은 대결에서도 역시 결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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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재레드 다이아몬드 박사의 명저 총,균,쇠 - 문학사상사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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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제국의 후예들이 사는 나라는 어디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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