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소개
“아프리카에 나의 열정을 심었다.
새싹을 기대하면서.”
한국인 최초로 아프리카 추장이 된 과학자. 1970년대 아프리카의 주식작물 카사바가 병들어 아사자가 속출하고 아프리카 전역이 식량난에 허덕였을 때, 미지의 대륙 아프리카로 날아가 카사바, 얌 등 작물 개량 연구에 청춘을 바친 사람이 있었다. ‘한국에서 온 아프리카의 성자聖者’, ‘한국인 슈바이처’로 불리는 식물유전육종학자 한상기 박사다. 초등학교 교과서와 베스트셀러 동화로 어린 세대에게 더 잘 알려진 ‘까만 나라 노란 추장’ 한상기 박사 90년의 삶, 사랑, 작물 이야기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농사의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체득했던 어린 시절, 배움에는 때가 있다는 부모님의 가르침 덕분에 이어간 학업, 농학의 세계로 이끌어 준 세 분의 은사님, 안정된 국립대 교수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아프리카로 향하게 된 계기, 아프리카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3년간 나이지리아 국제열대농학연구소(IITA)에서 작물 개량 연구에 고군분투한 과정, 그동안 내내 떨어져 지낸 아이들 곁으로 갔던 은퇴 후의 미국 생활, 그리고 치매에 걸린 아내를 보살피기 위해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의 삶까지…. 작물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따뜻한 인류애를 실천한 한상기 박사의 삶과 업적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깊은 감동과 큰 울림을 준다.

한국인 최초로 아프리카 추장이 된
한상기 박사 90년의 삶, 사랑, 작물 이야기

1970년대 아프리카 사람들의 주식작물 카사바가 병들어 아프리카 전역이 굶주림에 허덕였을 때, 아프리카로 날아가 카사바, 얌 등 작물 개량 연구에 청춘을 바쳤던 사람이 있었다. 당시 안정된 국립대 교수직을 버리고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연구소 초빙까지 뿌리치고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향했던 한상기 박사. 서로 국교가 맺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에서 나이지리아로 가는 5일간의 여정은 이후 지구를 20바퀴나 돌게 되는 한상기 박사의 파란만장한 인생의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나이지리아에 있는 국제열대농학연구소(IITA)에서 23년간 근무하면서 한상기 박사는 카사바, 얌, 고구마 등의 구근작물과 식용바나나의 품종 개량 연구에 주력했다. 미지의 작물인 카사바를 개량하기 위해 카사바의 원산지인 브라질로 가서 야생 카사바 종자를 도입했고, 이를 발아시켜 나이지리아 재래종 카사바와 종간 교잡하여 ‘내병다수성 카사바’를 만들어 냈다. 보급 체계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은 상황에서 한 박사는 바이러스 병과 박테리아 병에 강한 내병다수성 카사바를 트럭에 싣고 다니며 농가에 보급했고, 그 결과 아프리카 사람들은 점점 굶주림에서 벗어났다.
또한 아프리카 사람들이 스스로 농업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아프리카 농학도들을 훈련시켰고 이들이 자기 나라에서 농업연구를 해나갈 수 있도록 국제기구에서 자금을 지원받도록 힘썼다. ‘한국인 슈바이처’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니지만 의사 후배들을 양성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의술을 펼쳤던 슈바이처와 달리, 한상기 박사는 연구소에서 50여 명의 아프리카 농학도들이 석?박사 학위를 받도록 도와주었다. 또 단기과정을 통해 700여 명의 농학도들을 훈련시켜 보내, 그들이 고국에서 1만여 명의 농학자를 배출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워크숍과 트레이닝 과정을 통해 국가적 차원에서 식량 자급의 기틀을 마련한 아프리카의 ‘조용한 혁명(Quiet Revolution)’ 뒤에는, 황무지와 다름없는 땅에 식용작물 연구와 농업교육의 씨를 뿌린 한상기 박사가 있었다. 아프리카 식량문제를 해결한 한상기 박사를 세계은행에서는‘아프리카 조용한 혁명의 기수’라고 칭송했고, 나이지리아 이키레읍 주민들은 한 박사를 ‘세리키 아그베(농민의 왕)’라는 칭호의 추장으로 추대했다.

“이 일로 저는 1976년 나이지리아 국영지 《데일리 타임즈》 1면에 ‘More Gary For You’라는 기사에 실리게 됩니다. ‘국제열대농학연구소 한상기 박사의 연구로 카사바 병 문제가 해결되어 카사바 가공식품 가리가 더 나오게 되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나이지리아 국민들의 배고픔을 덜어준 일로 제 이름이 신문 1면에 실리는 일은 아주 큰 영광이지만, 나이지리아 사람들이 더 이상 배고프지 않게 된 것 그 자체가 오히려 더 큰 기쁨이고 행복이었습니다.”- 3. 가난의 길, pp.91-92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식량이고
제일 아쉬운 것이 사랑입니다.

한상기 박사의 90년 인생을 담담하게 돌아보는 자서전 《작물보다 귀한 유산이 어디 있겠는가》에서는 한 박사의 투철한 사명감과 함께 인간적인 면모가 잘 드러난다. 어린 시절 장마철이면 강물이 범람해 마을 사람들이 애써 지은 농사를 폐농하고 굶주림과 가난에 허덕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박사의 아버지 한노수 선생은 초대 장평수리조합장으로서 당시 고향 국회의원에게 건의해 앞들 수리사업을 추진하여, 국고로 제방을 쌓고 관수시설을 만들고 경지정리를 하며 농로를 마련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농사의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체득한 한 박사는, 농사일에도 다 때가 있듯이 배움에도 다 때가 있다는 부모님의 가르침에 따라 한국전쟁 막바지에 서울대 농학과에 진학했고 식물육종학의 길로 들어섰다. 한 박사는 이 책에서 자신을 농학의 세계로 인도해 준 세 분의 은사님에게 특히 존경과 감사를 표하고 있다. 잡초학을 연구하던 시절 식물육종학을 공부할 수 있게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교환교수의 기회를 준 지영린 박사, 미국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한 박사의 학문 세계를 한 단계 성장시켜 준 지도교수님 존 E. 그래피우스 박사, 그리고 학문뿐만 아니라 인생에 대한 가르침을 주신 성천 류달영 박사다.

“한 군이 단순한 농학자가 아니라 인생을 관조하고 따뜻한 인류애를 깊이 품은 것을 더없이 고마워했네. 나는 한 군의 값진 삶을 더없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네.”
- 성천 류달영 선생님의 편지 중에서, pp.205-206

한편, 한 박사는 당시 아프리카행을 선택하며 희생해 준 가족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도 표현하고 있다. 나이지리아 연구소로 가면서 가족들이 오랜 세월 동안 뿔뿔이 흩어져 지내야 했는데, 특히 23년간 나이지리아 연구소에서 근무할 때 늘 옆에서 고생해 준 아내 김정자 필로메나에게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한 박사의 결정대로 아프리카행을 감내해 준 아내에게 한 박사는 나이지리아 국제열대농학연구소 은퇴 후의 거취를 정하도록 맡겼고, 그렇게 은퇴 후에는 세 아이들이 있는 미국 클리블랜드로 갔다. 아이들과 손주들 곁에서 신앙에 충만한 시간을 보내다가 2013년 치매에 걸린 아내를 보살피기 위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젊은 시절 아프리카 식량문제를 해결하여 사람을 살리는 일에 몸 바쳤던 한 박사는 이제 한국에서 소중한 가족을 보살피는 일에 헌신했고, 2020년 9월 아내를 먼저 보냈다.

다음 세대의 생명을 위해
종자 연구, 작물 연구는 계속 되어야 합니다.

한상기 박사는 23년간 아프리카에서 생활하면서 배운 아프리카 사람들의 지혜도 함께 공유한다. 척박한 사막 주변에 뿌리 내리고 세세만년 위용을 뽐내는 바오바브나무는 그 잎은 채소로, 전분이 듬뿍 담긴 열매는 식량으로, 섬유질이 풍부한 껍질은 옷을 짓고 물건을 묶는 끈으로 사용하는 등 인간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존재다. 그러다가 사람이 죽으면 바오바브나무 밑동을 파내 시체를 보관하는 관으로 사용하는데 시간이 지나 시체가 썩으면 바오바브나무의 거름이 된다. 한상기 박사는 “네 이웃의 날이 너의 날이다.”라는 아칸족의 격언을 들어 척박한 땅에서 자란 바오바브나무도 인간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사는데 우리 인간이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느냐며 이웃과 서로 도우며 함께 살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기후위기, 전쟁 등으로 작물위기가 대두되고 있다. 은퇴한 과학자로서 한상기 박사는 자서전을 통해 후배 과학자들에게 농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생태계가 파괴되면 작물에도 영향을 미치고, 작물이 부족하면 우리 식탁에도 위기가 찾아온다. 언제까지 이런 배부름의 풍요가 계속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기에 작물과 종자에 대한 연구, 농학에 대한 연구를 이어나가 다음 세대에게 식량위기를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호소한다. 작물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따뜻한 인류애를 실천한 한상기 박사의 삶과 업적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깊은 감동과 큰 울림을 준다.

“아칸족 격언에 ‘과거를 언제나 귓전에 남겨두기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바친 저의 연구생활과 업적,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저의 모든 과거의 몸짓이 비에 쓸려 내려가는 종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의 연구 흔적들이 후배 과학자들의 귓전에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프롤로그, pp.15-16